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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인물24) 봉사의 인생, 서재필 목사 감사 인터뷰

작성자초록편지

작성일2015-08-05

조회수5,256

동서남북교회 서재필 목사 감사인터뷰

인터뷰 사회자 : 홍일권

* 서재필 목사의 인생역정 스토리는 정말 귀한 스토리가 담겨 있다. 실로 폭풍의 인생 과정을 경험하셨다. 마치 고난의 극치를 달리는 욥의 인생고와 같은 삶의 여정을 달려오셨다. 고난을 감사로 승화시켜 승리한 인생으로 그 흔적이 남아 있다. 한 마디로 격동하는 파도의 험난한 물결을 맞으면서 쓰러지지 않고 오히려 진주 같은 가치 있는 인생으로 역전시키는 감사의 인생으로 승화하며 승리의 길로 걸어오셨다. 서 목사는 동서남북교회를 섬기시고 또 우리나라에 청소년 선도와 봉사의 선구자적인 삶으로 50년의 세월을 바쳐 오셨다. 어느 덧 원로가 되어가는 길에도 그 뜻을 잊지 않고 더 귀한 뜻을 일구고 계신다. 참 스승을 찾기 어려운 시대에 감사인생으로 너무나 귀감이 되시기에 오늘 귀한 인터뷰를 기대해 본다.

 

-목사님의 어린 시절 극심히 힘든 과정을 보내셨지요? 그 이야기를 소상히 듣고 싶습니다. 소개해 주세요.

저는 1949년 전북 완주에서 태어나 당시 한국전쟁으로 부친을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성장했으나 하나님께서 저를 버리지 않으시고 지켜주신 은혜에 무척이나 감사했습니다. 1965년 초등학교 졸업 후에는 학비가 없어서 더 이상 진학하지 못했지요. 불평 원망을 하려면 끝이 없겠지만 저는 봉동초등학교 시절 그림, 운동, 붓글씨 등을 열심을 내어 도전하며 재능을 발휘하며 희망의 싹을 키워갔습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제게 찾아온 시련은 어린 학생으로도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당시 돈으로 2,180원의 중학교 입학금이 없어 더 이상 진학을 하지 못한 것이 평생 한으로 남았던 것이지요.

 

- 목사님 서울로의 상경 과정과 그 후의 일들을 좀더 소개해 주십시오.

이렇게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저는 곰곰이 한밤을 지세고 생각하며 결단을 내렸지요. ‘한양으로 상경하리라! 거기 가서 반드시 도전하고 성공하여 어머님께 보답하고 어려운 청소년들을 돌보며 선도하는 일을 하리라!’

1966년 15세 청소년 소년이 되어 완주 봉동을 떠나 무작정 상경해 밑천 140원을 마련해 구두통과 구두약을 준비해 길거리로 나섰습니다. 이렇게 저는 구두닦이 소년이 되어 거친 들판에서 때론 탈취를 당해가며, 때론 번 돈을 빼앗기기도 하면서, 심지어 맞아가면서 그 자리를 지키며 도전했습니다. 한 살 한 살 더 먹을수록 그 모든 어려움 앞에 굴하지 않고 나중엔 우산장수, 건어물 행상 등으로 전국을 다니면서 삶의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제게 용기를 주시고 은혜를 주신 것을 생각하니 지금도 감사한 것밖에 없어요.

당시 서울은 소매치기가 들끓었습니다. 불우한 환경의 아이들 중에는 그들의 유혹을 못 이겨서 그쪽으로 넘어가기도 했습니다. 그 패거리들은 저를 유혹하며 콜링했습니다. 제가 거절할 때에도 자신들의 패거리 그룹에 들어올 것을 위협하며 강력히 요구했어요. 하지만 저는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정상적인 노력을 통한 성공을 다짐하며 제가 땀 흘려 생업에 매진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타협하지 않고 어린 나이에 그것을 지켜냈습니다. 그 모든 유혹을 뿌리치고 올곧은 길로 걸어갈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주의 은혜이니 주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요. 이것이 큰 감사의 과정이었지요.

 

- 목사님께서 서울로 오셔서 그 어려움 가운데서 어떻게 청소년 선도에 앞장서시게 되셨는지 그 과정을 감사와 연결시켜 이야기해 주십시오.

저는 당시 16세의 어린나이 때에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일하며 돈을 모았습니다. 물론 불법으로 모은 돈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불법에 뛰어들어 불평하며 소매치기를 하거나 남을 속여서 돈을 버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정말 땀을 흘리며 노력하여 돈을 벌었습니다. 1967년 서울시 성동구 옥수동 424-441번지에 조그만 방을 하나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돈으로 10,000원에 1,000원짜리 월세방을 얻고 행주에 수저까지 준비해놓고 고향의 어머님을 모셔오게 되었습니다. 이 어머님을 모셔올 수 있게 되어 감사했습니다. 그 후 낮에는 노인분들이 와서 경로당처럼 쉴 수 있도록 하고, 그 후 9만 원짜리 방 두 칸을 터서 5만 원짜리 호마니카 전축을 구입하고 장구도 구입하여 그 어머님을 설득해 주변의 힘든 아이들을 데려와 같이 살다보니 식구가 십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어머님이 제 마음을 이해하시고 그걸 허락해주셔서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돈이 없어 나쁜 길로 빠지는 아이들도 데려왔습니다. 청소년 선도활동은 그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해(1967년) 옥수친목회를 결성하고, 전국을 다니며 우산장사, 건어물 행상으로 340만 원의 거금을(당시 강남 말죽거리의 땅 1평이 1,000원 정도임) 모은 저는 그것을 힘든 청소년들을 불러 모아 돌보는 데 투자했습니다. 그 아이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났습니다. 저는 그것이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한지요. 124명을 넘어섰습니다. 이 일을 통해 주변 경찰서는 물론이며 많은 사람들에게 입소문으로 제가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성동구 옥수파출소 원필재 소장, 김용순 동장으로부터 감사장을 받기까지 했습니다. 또한 저에게는 치안본부 이옥자 소년계장님을 알게 되어 양어머니로 관계를 맺고 많은 기도를 받게 되었습니다. 77년도 그 당시 처음으로 치안본부 소년계장이신 양어머님으로부터 전도를 받아 교회를 가게 되었습니다.

 

-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어린 나이에 그런 힘든 일을 해내셨다는 것이 너무나 자랑스럽고 놀랍습니다. 한 명도 아니고 수많은 학생들을 선도하며 이끌어 오셨던 지도력과 봉사의 섬김은 정말 경찰관들이 부끄러워하며 자신을 돌아보았을 것 같고, 또 무척 부러워했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종로 세운상가 청계천 중심으로 활동하신 모습들을 좀 소개해 주시지요.

제가 아마 22세 정도일 무렵인가 1974년이지요. 그 때 세운청계상가에서 세운청소년선도회를 조직하여 종로, 청계천, 을지로, 퇴계로 일대의 음란비디오 음란서적 및 야바위 추방운동을 펼치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들의 반열에 들어가지 않고 주의 뜻에 걸맞게 정화하는 도구로 쓰임받게 된 것이 너무나 큰 주님의 은혜인 것 같습니다. 당시 불우청소년 직업알선, 소년원 교화사업 등으로 사회에 이바지하기 위해서 온 몸을 다 바치며 밤낮 헌신 봉사했습니다.

그런데 제겐 최고의 폭풍우 시련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몰랐습니다. 불량배들이 자신들의 어두운 일에 (정화운동을 하는 제가) 그들 눈에 방해거리가 되니 저희 가정은 그들의 극심한 모함과 위협 때문에 피신하는 마음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 안타깝게도 2명의 자녀를 연탄가스 사고로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천청벽력 사건이었습니다. 저희 가족에게 너무나 혹독한 시련이었습니다. 저희 부부도 겨우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 목사님의 가족들의 아픔, 정말 얼마나 크셨을까요. 그런 아픔들을 어떻게 이기셨나요?



 

이 상황에서 어찌 감사가 흘러나올 수 있겠습니까. 저는 살아서 원수라도 갚고 싶어 그 놈들을 제거하고 싶었습니다. 그 놈들을 잡기 위해서 자동차를 운전하며 길이 막히면서 아내의 기도와 만류로 제가 주님께 항복을 하고 가슴에 품었던 마음의 칼을 내려놓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주님께 회개했습니다. 여기서 불평과 원망, 적개심 앞에 쓰러지기보다 하나님의 더 큰 뜻을 위해 감사로 승화시키며 앞으로 나아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 목사님 사모님과의 첫만남은 어떻게 이루어지셨는지요?

 

청년시절 권명순 사모와의 첫 만남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운명적 만남이었습니다. 첫만남에서 제가 준비한 명함을 건냈습니다. 이 명함 속에는 ‘세운청소년선도회장’이라고 적힌 명함을 건넸고, 뒷면에는 ‘청소년 선도 사업은 내 인생의 과업이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많은 대화를 나눈 후 권명순 사모가 서재필 목사에게 이런 말을 던졌어요.

“서재필 씨는 씨도 좋고 나무도 좋으신데 돋지 않아야 할 곳에 돋고 뻗지 아니할 곳에 뻗어난 것만 쳐주고 다듬어준다면 국제시장에 내놓아도 거목이 되는 데 손색이 없겠군요. 그 일을 제가 하지요.”

이런 말을 들은 저는 이런 여인이 나의 부인, 평생의 반려자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적극적인 데시를 했습니다. 처가의 탐탐치 않은 순간에도 1977년 1월 1일 금반지 하나 가지고 약혼식을 하는 가운데 둘째 동서가 약혼식장에서 사회를 보는데 그 엄숙한 자리에서 나에게 말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오늘 권씨 가문에서 훌륭하게 키운 권명순 딸을 아무것도 없는 서재필에게 이렇게 시집보낸다는 사실이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어요.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생각될지 몰라도 권명순 씨가 권씨 가문에서 훌륭하게 키워 어느 누구를 만나서 시집가는 것보다 초라하게 보이는 이 서재필에게 시집간다고 하는 사실은 훗날 권씨 가문에 크게 빛낼 수 있는 그런 서재필이가 되겠습니다. 나를 한번 믿어주고 지켜봐달라” 하며 그 자리에서 용기 있게 말하고 자리에 앉았습니다.

 

단 두 번의 만남으로 두 사람은 서로를 평생의 반려자로 정하고, 권명순 사모는 원래 초등학교 교사직을 감당하고 있었는데 그걸 접고 개인 사업을 하면서 제가 신학공부하며 동서남북 교회를 설립 목회하는 일과 사회봉사의 든든한 동역자가 되어주었습니다. 살아오면서 숱한 어려움들과 고통의 나날들을 이겨내어 나의 곁에서 함께 동역해 주신 마음과 삶을 생각하면 고마움 밖에 없지요. 바보온달과 평강공주를 비유할 만큼 나 자신은 “바보 온달”이나 다름없고, 아내는 정말 끝까지 잘 내조해주며 뒷바라지해준 “평강공주”입니다.

 

그렇게 해서 약혼후 정말 40년 만에 집사람이 남편 성공시키고, 훌륭한 가정 만들고, 교회 건강하게 정착시키고, 이제 강원도 영월 땅에서 원하던 붓글씨도 쓰고 그림도 마음껏 그려내는 축복의 시간이 현실로 다가와 큰 위로가 되고 있습니다. 귀한 현모양처가 되었네요.

 

- 목사님, 체육관을 운영하셨다면서요?

 

 

저는 1984년에는 불의한 자들의 모함으로 누명을 쓰고 옥고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의지를 꺾지 않고 운영했던 것이 체육관입니다. 이 체육관은 단순히 운동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운영한 체육관은 운동의 능력도 기르지만 지체장애자, 60세 이상 노인, 군인, 경찰 등에게 무료로 개방해 건강지도, 장애자 보호, 고아원, 양로원, 소년원, 군부대교도소 위문활동을 전개해 왔습니다. (관훈: ‘건전한 정신과 건강한 육체로 사회정화와 청소년 선도에 앞장선다’) 곧 체육관의 목적이 신체력 보강은 물론이고 이웃의 봉사와 섬김을 위해서입니다. 보이는 체력으로 이기려는 것이 아니라 그 힘을 봉사와 섬김의 기회로 활용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사랑의 힘이며, 은혜에 대한 보답, 감사의 힘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이리라 생각되었습니다.

 

당시 불량배들은 제가 잘 되는 일을 시기질투 모함하여 내어 쫓으려고 온갖 계략을 다 써서 괴롭혔습니다. 그 여파로 도망가다시피 피신하여 얻은 지하 월세 단칸 방에서 이사한지 5일만에 연탄가스 사고로 두 딸을 잃어버리고, 저희 부부도 생사를 가늠하는 위기를 넘기면서 2개월만에 재기하여 다시 관원을 열면서 재기했습니다. 그러나 저들의 모함은 끝이 나지 않고 구치소로 잡아넣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파란만장한 고통의 과정을 받으면서 저희 가족을 너무나 억울하게 참혹한 신세로 만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긴 고통의 과정을 통하여 욥처럼 단련시켜 정금처럼 나오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저로 하여금 목회자로 만들어주시고, 주님의 십자가 용서처럼 그런 그들을 용서하고 축복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하나님께서 극적으로 내려주셨습니다. 이건 사람의 힘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제게 도움을 받고도 배신하고 또 도움 받고 또 배신하고, 이렇게 수없이 그런 과정들을 거치면서도 모든 것을 앗아가게 한 그 원수들을 위해서도 축복하고, 주님의 제자이기 때문에 그들을 품으며 승리했습니다. 주님은 죽기까지 원망하거나 불평하거나 짜증내지 아니하시고 주님이 그리하라 하시니 그들을 위해서 용서하고 축복하고 감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 목사님의 여러 상을 수상하셨지요? 어느 언론에 보니 이런 상이 나열되어 있더군요. 1991년 8월 세종문화회관에서 청소년선도유공자로, 영예의 대통령 표창 수상, 서울시 정의로운 시민상, 사회정화위원장의 공로상 수상 등 불우한 환경을 극복하고 청소년 선도 사업에 앞장서온 모습의 결실인 것 같습니다. 이런 상들을 타게 된 이유나 소감을 소개해 주세요.

 

제가 걸어온 인생길을 돌아보면 밑바닥생활에서 불우청소년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게 된 후 여러 우범지대, 탈선현장을 오가면서 천 명이 넘는 불우청소년들을 구출하고 돌보며 바른 길로 인도하려고 부단히 힘쓰며 그 가시밭길을 걸어왔습니다.

상을 타게 된 것은 제가 잘났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께서 제게 주신 강인한 용기와 투지의 선물 때문이었습니다. 성실히 최선을 다하여 앞장서서 섬기며 봉사하니 그 내용들이 자연스럽게 주변에 알려지게 되었지요. 나중엔 각계각층의 지도자들에게까지 입소문으로 번져 들어갔습니다.

제가 청계천 세운상가 일대에서 목숨 걸고 불의와 타협하지 아니하고 올곧은 길, 정화의 길, 정의의 길로 걸을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부터 고난 가운데 내려주신 강인한 은혜의 힘입니다. 바로 위로부터 내려주신 은혜의 힘, 담대함이지요. 이런 상을 탄 것은 나의 힘이 아니요 모두 주님의 은혜입니다. 좋은 부모님의 희생과 교육 덕분이며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저를 불 속에서 단련하시고 잘 키워주신 은혜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모든 감사를 주께 돌려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청계천 세운상가에서 봉사하시면서 느낀 보람은?

 

청계천 세운상가는 범죄의 온상 지역입니다. 어두운 환경, 어두운 문화로 인하여 청소년들의 탈선에 처처에 유혹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폭력, 도박, 속임수, 음란물, 소매치기 불량배들, 질이 좋지 않은 패거리들이 곳곳에 침투해 들어오는 곳입니다. 이런 곳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를 굳게 지켜내면서 많은 청소년들을 선도하며 어두운 사회를 밝고 맑은 사회로 정화하고, 어려운 형편에 처해 갈 곳이 없는 아이들을 돌보기도 하며 그렇게 인내로 감당하는 동안 그 아이들이 변해가는 모습을 보고 보람과 깊은 감사를 느낍니다. 소매치기 대열에 섰던 아이들이 거기서 빠져나와 바른 모습으로 회귀하고 건강하게 자라가는 모습, 불효자식이 효자가 되어 가는 모습, 먹을 양식이 없는 청소년들과 힘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양식을 나눔으로 그들이 공급받아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습들을 보니 무척 감사하고 보람되었습니다. 정부와 경찰들이 해야 할 일을 제가 용기 있게 감당하니 경찰서에서도 깜짝 놀라며 사방에서 제게 감사의 마음을 전달해 주시고, 감사장도 주시고, 격려해 주어 보람을 많이 느꼈습니다.

 

참 한 가지만 덧붙여 이야기하겠습니다. 이종국 전 치안본부장께서 저에 대하여 추천글을 하나 쓰셨는데 길지만 짧게 몇 줄만 소개해 봅니다.

“.... 제가 이곳에서 서장으로 부임해서 직무를 수행하다 보니 세운상가에 서재필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있었어요. 세운상가 일대에서 세운 체육관을 운영하던 관장인데, 당시 세운상가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모여드는 위험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곳에서 아무도 시키지도 않았는데 청소년 선도사업을 앞장서서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 종로서장으로 있을 당시 불량 청소년을 잡아와 법적조치를 하려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서 관장이 어디서 들었는지 불현듯 찾아와 즉결 재판에 넘기면 안 된다고 애걸복걸하는 게 아닙니까? 그리곤 전과자가 되면 돌이킬 수 없다며 자신이 책임질 터이니 선도위원회 위원으로서 맡겨달라고 하는 게 아니겠어요. 하도 간청하기에 시한을 정해 놓고 맡겼어요. 아! 그런데 그 아이가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겁니다. 그때 세삼 깨달았어요. ‘역시 청소년 선도사업은 서재필이다.’라는 깨달음 말입니다.”

 

- 사모님께 대한 감사를 소개해 주세요.

 

권명순 사모는 정말 고생 많이 했어요. 만나 결혼시부터 본인을 희생하며 섬기는 모습이 남달랐어요. 그 잘나가던 초등학교 교사직도 내려놓고 오히려 개인 사업을 하며 제가 신학공부와 교회설립 및 사회봉사까지 든든한 동역자의 손발이 되어주어 무척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불량배들이 득실거리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 위협을 받으면서도 한결같이 저와 뜻을 같이 하여 제 사역을 내조하며 모든 어려움과 고통을 감내하며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열심히 섬겨온 모습은 평생에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아내를 주신 하나님께 특별히 감사하고, 두 아이를 희생하면서까지 청소년 선도사역과 동서남북 목회 사역에 평생 반려자로 남아 일편단심으로 섬겨주는 모습은 아내에게도 감사하고, 하나님께 모든 감사와 영광을 돌려드립니다. 서울에 현재 살고 있는 아파트보다 더 자연에 가깝고 멋진, 이미 마련해둔 영월 땅에 아름다운 보금자리를 마련하여 작게나마 보답 위로하고자 합니다. 많은 눈물을 흘렸을 아내를 하나님께서 많이 위로해 주시길 바랍니다.

 

- 이어서 두 자녀를 잘 기르셨던데 기르시면서 보람과 감사를 느끼는 부분을 소개해 주세요.

 

 

두 딸이 하나님의 뜻, 부모의 뜻을 이어받아 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성장해 가는 모습을 볼 때 부모로서 주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않을 수 없습니다. 큰 아이 세정이는 연세대와 대학원, 그리고 박사과정을 거쳐 일본 시마네현대학 한국어 강의를 하고, 둘째 유민이는 대일외고와 한양대를 거쳐 한세대 신학대학원 목회학 석사 과정과 연세대학교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아빠를 도와 뒤를 이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두 자녀의 길, 역시 아버지의 마음을 따라 이웃 사랑과 조국애의 심비를 가슴에 품고 사회 속에서 빛을 드러내며 각자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 동서남북 교회를 세우면서 그 과정과 감사한 일들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저는 이 사회의 무너진 가정들의 회복을 위해 고민해 오다가 오직 주의 은혜로 구원과 부르심을 받고 1996년에 동서남북교회를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에 따라 청소년 선도와 가정 사역에 중점을 두고 하나님의 복음 전파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양성 사역을 감당해 왔습니다. 보다 전문적인 청소년 및 가정 사역을 위해 전문적으로 공부했고, 연세대연합신대학원 상담전문과정에서 삼당자격증을 취득하고 2008년 리버티 신학대학원에서 “가정회복을 통한 성공적인 청소년 목회에 관한 연구” 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목회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지금까지 교회를 중심으로 청소년 사역과 가정 사역을 감당하던 중 더 큰 헌신을 원하시는 주의 강권하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요즘 사회는 청소년의 범죄와 학교 폭력 문제가 더욱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이들을 선도하며 구원할 참 방법은 오직 하나님의 복음,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교회가 이 땅의 청소년에게 꿈과 희망을 주어야 하고 그들을 잘 선도하여 주님의 나라와 이 사회에 빛과 소금의 사명을 잘 감당하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 목사님께서는 세계청소년 복음화운동본부를 설립하셨다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좀 들려주시지요.

 

 

저는 2012년 11월 세계청소년 복음화운동본부를 설립하고 본부장으로 취임했습니다. 세계청소년 복음화운동본부를 세운 동기는 학교폭력 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청소년 문제에 새로운 물꼬를 트기 위해서 세워졌습니다.

제가 몸소 가난과 불행으로 얼룩진 청소년 시절을 보내오면서 하나님께서 저 어려운 청소년들을 돌보라는 소명을 강하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청소년 선도는 하나님께 부르심 받기 전 제 인생의 슬로건이며 일생의 과업이다”라고 인생목표를 설정했습니다. 방황하는 청소년 아이들에게 길을 찾게 해주고 용기를 주고 진로를 함께 찾아 주는 일은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할 숙제라고 생각했는데 바로 제게 주신 소명이더군요.

 

제가 그 꿈을 구체적으로 이루기 위해서 1974년 종로에서 세운 청소년 선도회를 조직해 활동했습니다. 1995년에는 은평구 증산동에서 동서남북 선린회와 동서남북 도서관을 개관하여 지금까지 청소년들에게 독서 환경을 제공하고 청소년 상담과 선도에 매진해왔습니다. 세계청소년 복음화운동본부 설립도 지금까지 펼쳐온 청소년 선도사업의 연장선입니다.

2011년 강원도 영월에 기도원 및 청소년 수련원 부지를 매입하면서 이젠 지금까지 해온 서울 사역들뿐만 아니라 영월에서까지 세계 청소년 복음화 운동본부 사역을 한층 더 넓히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청소년 선도와 사회 정화를 위해 40년간 일해 온 일과 19년 동안 동서남북 교회를 통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제자들이 성장하고 있어 감사와 보람을 느낍니다. 세계청소년복음화운동본부와 동서남북교회, 이 두 바퀴의 사역은 더욱 주의 복음에 굳게 서서 예수님을 본받아 순종과 겸손 헌신과 봉사로 교회와 사회, 국가와 한국 청소년들, 나아가 세계청소년을 섬기며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제자들을 키우는 산실로 기대합니다.

 

- 마지막으로 서 목사님께서는 성경을 필사하기도 하셨고, 또 일기를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평생 동안 써 오셨는데 저는 정성을 들인 그 일기장들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일반 기자도 그렇게 쓰기 어려운데 어떻게 그런 일기를 쓰셨는지요?

 

*서재필 목사 50년간 쓴 일기장
 

일기 하면 우리나라 이승만 초대 대통령, 이순신 장군 등이 있습니다. 저도 제 인생의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하루하루 삶을 가치있고 보람있게, 대의를 위해서 드려지는 시간들이 필요하였고, 그것을 점검하고 성찰하며, 진실과 성실로 하루하루 삶을 엮어가는 발자취 흔적을 기록함으로써 제 내면을 성장시키고 그리고 나아가 우리의 후대에게 우리 민족의 역사를 알리고 싶었고, 그리고 나의 작은 삶도 빛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일기를 매일 쓰고 있습니다. 그 일기에는 소중한 꿈들이 들어 있고, 그날 있었던 국가적인 일, 국가적인 사건사고뿐만 아니라 소중한 만남의 사람들과 마주한 이야기들을 담았습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보여드리고, 책상에 꽂아두며 조국을 위해서 또 선한 비전을 위해서 기도하게 됩니다.

 

제 일기의 역사 50여 년의 지난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지금도 매일 써 나가면서 나라사랑, 사회정화, 봉사사역의 뜻과 연결되어 아름다운 만남의 흔적들이 배어 있습니다. 이것은 자랑이 아닌 감사의 사건이며, 자라는 아이들, 청소년 새싹들에게 작은 보석이 되길 희망합니다.

 

[감사 인터뷰 마무리]

 *총재강지원변호사와사무총장서재필목사


우리나라는 세월호 사건과 군부대 방산비리, 성완종 사건 등 엄청난 사건들이 연이어 터져 나와 우리 아이들과 젊은이들에게 우울함을 주며 절망을 주며 좋은 스승을 찾기 어려운 시대에 혹독한 비바람을 맞으며 역경 중에 피어난 서재필 목사님의 삶은 아름다운 진주의 삶으로 돋보입니다.

지금까지 나눈 이야기 외에도 강지원 변호사와 함께 범죄예방운동본부에도 참여하고, 시민단체 연합의 일들을 활발하게 진행하고 계시기에 사회와 국가를 위해 한결같이 온 생애를 던지며 나아가는 모습은 정말 이 시대에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서 목사님은 감사로 날마다 자신을 던지며 헌신하는 모습, 늘 한결 같은 힘든 청소년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 우리 후대에 자랑할 만한 축복이 되리라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편집자 주)

 

* 서재필 목사의 손으로 직접 쓴 성경필사

 

 * 서재필 목사, 권명순 사모, 서세정, 서유민, 사위 에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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