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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인물-16) 유관순 열사

작성자초록편지

작성일2013-03-02

조회수5,912

유관순 
                                     
                                           엮은이. 초록편지  www.greenletter.net 

 

(사진: 위키백과)

유관순 열사에 대해서

3월이 되면 그 누구보다 유관순 누나가 생각난다.
유관순 열사는 고흥(高興)류(柳)씨 집안에서 
1902년 3월 15일 충남 천안군 동면 용두리
(현재 병천면 용두리 지령부락)에서
아버지 류중권씨와 어머니 이소제 여사의 5남매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 아버지 류중권은 교육의 중요성을 일찍 깨닫고 
기독교 감리교에 입교하여 가산을 바쳐 향리에 홍호학교를 설립했고, 
민족 교육운동을 전개한 계몽운동자로서 활약했다.
작은 아버지는 감리교회에서 일요일에만 교회에
올 수 있는 선교사들을 도와서 평일에 회일을 맡아왔었다.
그 영향으로 어릴때부터 매봉교회 주일학교에 다니면서  
총명하여 외국인 선교사가 이화학당 보통과에 입학시켜주었다.

▣ 1919년 3월 1일 만 17세 때 독립만세 운동에 참여했다.

▣ 3월 10일 일제의 휴교령으로 학교가 폐쇄되자 
3월 13일 독립선언서를 휴대하고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왔다. 

▣ 4월 1일 만세운동을 벌일 것을 계획하였다.

▣ 3월 31일 매봉산의 봉화불을 신호로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수천명이 모였고 선봉이 되어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 이 시위로 유열사의 부모를 비롯해 19명이 순국하였고,
유열사도 부상을 입은채 체포되어 공주감옥으로 송치되었다.

▣ 유관순 열사에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재판에
항거하여 3년형을 받았으나 복심법원에서 법정모독죄로
가중 처벌되어 7년형을 선고 받고 8월 1일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되었다.

▣ 유열사는 옥중에서도 대한독립만세를 계속 부르다가
엄청난 폭행과 악독한 고문에 못이겨 1920년 10월 12일 오전 8시
만 18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 유관순 열사의 마지막 메시지는 이것이었다. 
"나는 죽일 수 있어도 우리나라 독립은 막을 수 없다.
너희들은 반드시 망하고야 말 것이다."
마지막 한마디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 정부에서는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추서 하였고,
1972년 10월 14일에 봉화지와 생가지를 사적 230호로 지정되었다.


그녀에 관해 민족해방운동의 투사에 아래 기록이 남아 있다. (사랑방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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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하늘 가만이 우러러 보며 유관순 누나를 생각합니다...... 어릴 때 누구나 불렀던 노래 한소절이다. 그러나 기념관에 모셔 둔 유관순 영정은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마치 열녀 사당 을 연상케 한다. 그곳에는 1919년 민족해방운동을 앞장서 이끈 투사 유관순은 없었다.

1904년 천안 부근에서 개신교를 믿고 일찍이 학교를 세워 교육운동을 전개한 유중권의 딸로 태어난 유관순 열사는 1918년 이화학당에 입학하고 여기에서 아버지의 영향과 애국교육 운동 이 결합되어 조국의 독립 의지를 깨우친 운동가로 다시 태어났다.

1919년 3월 1일, 고종 황제의 장례가 거행되던 날, 고종의 독살 소문이 온누리에 퍼지고 이 것이 계기가 되어 민족적 울분이 폭팔하게 되었다. 동경 유학생들의 독립선언에 영향을 받은 33인의 민족 대표들이 민중의 투쟁 의지에 떠밀려 독립선언서를 준비했으나 요리집 태화관에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스스로 일경에 알리어 모셔가도록(?)하는 등 처음부터 일제와 타협하 는 무저항주의라는 온건한 투쟁방식을 채택했다.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독립 투쟁을 나선 것은 학생들이었으며, 노동자 농민 일반 시민들 이 이에 가세하였다. 독립을 향한 의지는 불길처럼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바로 민족해방운동 의 불꽃 속에 유관순이라는 학생 열사가 들어 있었다. 단순하게 만세 운동이 아닌 무력 항쟁 을 벌이며 노도와 같은 기세로 해방의 불길은 피어 오르자 당황한 일제는 군대를 총동원하여 총칼로 무참히 진압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때 분출한 민족의 항쟁력은 이후 민족독립항쟁의 뿌리가 되었다.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총집중하여 임시 정부도 구성되었으며, 일제도 더 이상 무단통치를 계속할 수 없었다.

유관순 열사는 옥 중에서도 "나는 한국사람이니 너희들에게 재판 받을 필요가 없다."고 하 면서 유관순은 재판을 거부했다. 서울 서대문형무소의 모진 고문 속에서도 투쟁 의지를 잃지 않고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저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했습니다. 2천만 동포의 10 분의 1만 목숨을 내놓는다면 독립은 곧 될 것입니다."

1920년 10월, 꽃다운 나이 17살에 유관순은 순국하였으며 시신조차 거둘 수 없었다. 그래서 지금 기념관의 묘는 시신이 없는 허묘(墟墓)로 남아 있다.

[*충청남도에서는 유관순 열사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고
그 얼을 오늘에 되살려 진취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사고로
국가와 지역사회발전에 이바지한 여성(여학생) 또는 단체를
전국에서 선발한다. 유관순 횃불상은 고1 여학생에게 수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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